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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용은 대한민국의 군인출신이며  정치인 이었다. 하나회의 일원으로서 12.12 군사반란, 5.18 광주시민 학살 등에서 관여 되어 있는 인물이다.

정호용은1932년 대구에서 태어나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후일 육군사관학교의 동기가 되는 노태우는 경북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이자 동창이었다. 경북고-육사 동기로 김복동도 있다.

1951년에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25 전쟁 중 육군에 병사로 입대하여 참전하였다. 그 뒤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전두환, 노태우가 육사 11기 동기생이다. 1964년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김복동 등과 사적 모임인 하나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1977년 육군특수전사령부 참모장을 거쳐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1978년 제50보병사단 사단장이 되었다. 12.12 이후 정병주의 뒤를 이어 특전사령관에 취임했다.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광주와 서울을 세 차례 오가면서 공수부대에게서 보고를 받거나 현장 상황을 확인했다. 5월 27일 상무충정작전 직전 육군본부로부터 가발, 수류탄 등 군수품을 지원받아 현지의 공수부대에 제공 논란이 있다.

1981년 대장으로 진급하였고 그 해 12월 제3야전군사령관이 되었다. 1983년 12월 황영시의 뒤를 이어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했다.

1985년 12월 예편한 다음 일해재단 연구위원에 임명되었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초기 수습책으로 김종호의 뒤를 이어 내무부장관에 임명되었다가 4개월 만인 그 해 5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축소 의혹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 등에 의해 폭로되면서 민심 수습 차원에서 개각이 일어나 노신영 국무총리,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 등과 함께 경질되었다. 

6월 항쟁과 6.29 선언 이후인 같은 해 7월 국방장관으로 내각에 복귀하여 전두환이 퇴임할 때까지 재임하였다. 짧은 재임기간 때문에 국방장관으로서 눈에 띄는 치적은 없었지만, 해병대 사령부의 재창설이 실현된 것 정도가 그나마 기억될 만한 성과이다.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대구직할시 서구 갑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여소야대 국회에서 대한민국 제5공화국 비리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청문회로 사회 여론이 공직사퇴요구를 제기하자 결국 1990년 1월 8일에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이후 명예회복을 위해 자신의 지역구 보궐선거에 다시 출마했지만 정치적 부담을 느낀 노태우 정부의 압력에 의해 후보직에서 다시 사퇴했다.

1992년 다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민주자유당 문희갑 후보를 꺾고 당선되고 후에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의 대통령 선거운동을 도왔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의 과거청산 작업에 따라 1996년에 다시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관련 혐의로 구속되었다.

정호용
1932년 9월 10일, 대구
전 내무부/국방부 장관

학력
경북고등학교
육군사관학교

경력
제14대 국회의원
제13대 국회의원
제25대 국방부 장관
제45대 내무부 장관
제25대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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