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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희재는 대한민국의 우파 정치 평론가이자 미디어 비평가이며 정치인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출신이지만 서울 용산구와 서초구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반포중학교, 경문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하였다.병역은 카투사로 마쳤다.

1999년 안티조선 운동에 동참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98년 월간조선의 기사로 소위 최장집 사상논쟁이 일어나자, 강준만, 고종석, 김정란, 진중권, 김규항, 홍세화 등 당대의 자유주의 및 좌파 성향 지식인들이 한국사회에서 가장 비중있는 매체인 조선일보를 무소불위의 언론권력이라면서 동시다발적으로 비판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문이 일었고, 여기에서 변희재는 처음에는 무명의 행동대원 정도였지만 곧 왕성한 활동으로 인터넷상에서 안티조선 운동의 전사라는 평가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우연치 않은 계기로 시작돼서, 명확한 노선과 행동강령이 없었던 안티조선 운동은 언론환경의 변화나 조선일보의 영향력 쇠퇴보다는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이 자신의 지지층을 결집시키는데 활용되는데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안티조선 운동에 동참했던 지식인들은 2002년 이후 각자의 신념에 따라서 뿔뿔히 흩어지게 된다.

그 뒤, 안티조선 운동과 인터넷미디어의 폭발적인 성장 속에서 변희재는 1999년 창립된 진보성향의 인터넷 언론 대자보를 포함해서 다양한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면서 인터넷 출신 논객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날리게 된다. 이때, 사사로운 자리에서는 자신의 서울대 미학과 선배인 진중권을 띄어주는 글도 여러 차례 기고하기도 했다. "진중권은 이 사회에 보기드문 상식적인 좌파이자, 유쾌하게 세상을 사는 분"이라고 띄어주면서 심지어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가 자신의 학문적 길라잡이라고 칭송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는 대자보가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방하자, 아예 친노 사이트 서프라이즈로 자리를 옮겨서는 노무현을 찬양하면서 한나라당과 조선일보를 사정없이 공격하는 글들을 무수히 쏟아내었다.

그러나, 2003년 새천년민주당 분당과 열린우리당 창당 그리고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를 거치면서 점점 비노로 전향하였고, 분당 이후 쪼그라든 새천년민주당을 대놓고 지지하던 브레이크 뉴스로 활동공간을 옮기면서 비노의 선봉장으로 활동하면서 "호남을 무시하지 말라!" 같은 주장을 하였다.

그리고 브레이크 뉴스를 떠나서 2006년 9월 인터넷 우익언론 빅뉴스를 창립하면서 사실상 극우로 전향하였다. 변희재는 당시 진보성향을 띠는 우석훈이 제기한 88만원 세대론이 사회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자, 조선일보와 함께 실크세대론을 집중 제기하였다. 실크세대론은 요약하면 '20대 창업론', '20대 CEO론'으로 '기성세대의 도움 없이 20대 스스로 일어서자', '기회는 충분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특히 장본인인 20~30대 사이에서 88만원 세대론 만큼의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사실 88만원 세대론도 정작 진보/좌파 성향 학자들한테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다. 통계, 실증 연구가 전혀 없이 그냥 끼워 맞춘 이야기에 불과하며 오히려 한국사회의 양극화 문제를 20대와 50대 사이에서 벌어지는 단순한 세대갈등으로 치부해서 정작 중요한 상위 1%와 99% 사이에 있는 계급갈등이 가려졌다는 것이다.

인터넷 상에서도 88만원 세대론에 상당히 많은 반론이 쏟아졌으며 개혁진영에서는 2012년 대선 뒤에 지나치게 세대갈등론에 집착해서 20~30대만 주목하다가 50대를 모두 놓쳐서 대선에서 패배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빅뉴스와 실크세대론이 인터넷상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 했지만 변희재는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면서 조중동의 집중 조명 속에서 일약 청년우익 논객으로 우뚝 서게 된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는 더더욱 우경화해서 사실상 뉴라이트와 마찬가지의 극우파로 변신해서 더더욱 활동폭을 넒혀 나갔고 이 과정에서 자유주의 개혁세력, 좌파진영과 무수한 마찰을 일으켰다. 함께 안티조선 운동을 하는 등 한때 좋은 관계였던 진중권에게 듣보잡이라고 까이자 명예훼손 소송을 거는 등 난타전을 벌인 것도 이 시기이다. 이 소송 자체는 진중권이 명예훼손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변희재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인터넷상에서 '변듣보'라는 멸칭이 붙어버렸다. 이후 상대를 자극하는 언사로 사람들을 공격하는 일이 늘어났고 이에 격분한 인사, 단체들의 소송이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변듣보 소송 이후로는 변희재의 연전연패로 지금까지 벌금과 배상금을 꽤 물었다. 

이후 빅뉴스를 미디어워치로 확대개편하면서 단순한 보도 언론에서 논문 검증 등으로 활동폭을 넒혔다.

변희재 본인이 훗날 인터뷰에서 밝힌 전향 계기는 한국사회의 여론을 쥐락펴락하는 조선일보에 대한 반감으로 안티조선에 동참했던 개혁진보 성향의 지식인들과 시민단체들이 정작 새로운 미디어 권력으로 떠오른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는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지지하는 듯한 모양새를 보여서라고 한다. 당시 오프라인 언론사의 기사를 자기들 입맛대로 이용해서 조회수와 영향력을 높혀가는 네이버의 행태에 분노해서, 주변 인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오히려 '인터넷을 키워서 조선일보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식의 논리로 무시하더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소위 민주언론 운동을 한다던 최민희 민언련 대표를 포함한 시민운동가들한테 폭언을 들었다는 주장도 인터뷰에서 했다.

그리고 인터넷 언론과 포탈사이트의 문제점에 관한 칼럼을 쓰자 소위 개혁매체들은 하나같이 싣기를 거부했고, 조선일보에서 연락이 와서 '안티조선'이라던 자신의 신념을 접고 투고하였고 이러면서 기존에 같이 하던 주변의 개혁/진보 성향 인사들과는 완전히 연이 끊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변희재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에 안티조선보단 안티포탈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문제는 변명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다. 개혁/진보 성향을 계속 고수하면서도 인터넷언론의 폐해와 포탈사이트의 여론독점에 관해서 비판하는 지식인들도 많기 때문이다.

한편 안티조선 운동 초창기부터 무조건 안티조선 = 노무현 = 진보개혁식의 기계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주다가 2003년 민주당 분당 이후 점점 반노무현으로 돌아서면서 "나는 반노무현 = 반진보 = 보수우익"식의 논리로 전향했다고 분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마디로 극단적인 흑백논리, 이분법에 사로 잡혀 있다는 비판이다.

정치평론가 유재일의 의견에 따르면 정의를 위한다는 진보, 혹은 친노세력에게 매력을 느끼고 친노활동가로 활동하면서 진보의 민낮과 온갖 추태를 보고 환멸을 느낀 뒤 보수로 전향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면서 유재일은 두 가지를 한탄하는데 하나는 왜 친노를 진보와 같게 생각하여 진보의 추태를 보고 친노까지 패대기치는가. 또하나는 "그래, 그거 이해하는데... 그렇다고 저쪽으로 넘어가냐?"

2019년 4월 9일 JTBC의 "최순실씨 태블릿PC 보도가 조작됐다"고 주장해 1심에서 2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구속된 변희재가 항소심 첫 공판 당일 출석을 거부했다.  
변희재는 9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4부(홍진표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항소심 첫 공판에서 '불출석 사유서'를 재판부에 내고는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다.  
변희재는 사유서를 통해 "구치소 출정소의 안내문에는 '70세 이상 노인 혹은 여성의 경우 수갑을 채우지 않을 수 있다'고 적혀 있는데, 지난달 말 수갑을 차지 않고 법정으로 향하는 김경수 경남도지사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심지어 70세 이상인 이병기 · 남재준 · 이병호 등 전 국정원장들도 수갑을 찼고 포승줄만 면제됐다는 점을 확인했다"면서 "최소한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문재인의 최측근 김경수만 특별히 수갑을 차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만약 이런 상황에서 제가 부당하게 수갑을 차고 보석심리를 받게 되면, 시작부터 '도주의 우려가 있는 자'로 찍히게 된다"며 불출석의 정당성을 호소했다. 
앞서 변희재는 "수갑을 채운다면 재판에 가지 않겠다"고 서울구치소 측에 요구했으나 구치소로부터 "일단 재판에 다녀온 후 심사를 통해 수갑 착용 여부를 결정하자"는 답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2019년 5월 17일 명예훼손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받고 구속됐던 미디어워치 대표고문 변희재(45)씨가 항소심에서 보석으로 석방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4부(홍진표 부장판사)는 17일 변희재 씨의 보석 청구를 받아들였다. 변희재 씨와 함께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미디어워치 대표 황모(42)씨도 보석으로 풀려났다.

재판부는 변희재 씨의 주거지를 일정한 장소로 제한하고 허가 없이 출국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아울러 이 사건과 관련된 일체의 집회나 시위에 참가할 수 없다는 조건도 내걸었다. 또 피해자들에게 해를 가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주거나 직장에 접근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보석 보증금은 5000만원으로 이 중 3000만원은 보석보증보험증권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했다.

지난해 5월 검찰은 합리적 근거 없이 '태블릿PC 조작설'을 유포한 변희재 씨 등을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했다. 지난해 12월 열린 1심은 변희재 씨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변희재
1974년 4월 22일, 경기도 강화군
183cm, A형
대한애국당

학력
반포초등학교
반포중학교
경문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미학 학사

경력
미디어실크에이치제이 대표
한국인터넷미디어협회 대표
미디어워치 대표
미디어발전국민연합 공동대표
브레이크 뉴스 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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