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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돈은 대한민국의 교육자이며 법학자이기도 한 정치인이다.  20대 국회에서 국민의당 소속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하게 되었다.
1951년 12월 4일 경상남도 부산에서 태어났다. 출생지만 부산이지 실제로 자란 곳은 서울이다. 6.25 전쟁 휴전 후 서울특별시로 재상경하여 4대문 안에 있는 종로구 체부동에서 살았다. 외조부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인 춘곡 고희동이다. 고희동은 장면과 가까운 사이로, 1960년에 4.19 혁명 이후 치루어진 재보궐 선거에서 민주당으로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하였다.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부, 석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법대에 진학했지만 고시 준비는 적성에 맞지 않았는데 대학원에 가서 책을 읽으니 마음이 편해졌다고 한다. 대학 시절부터 타임즈지를 읽고 영어로 된 책을 많이 읽고 공부하면서 외국의 각종 학술서를 읽고 영향을 받았다.

국내에서 공부하던 시절 전공은 공법(헌법과 행정법)이었다. 석사 논문은 '미국 대법원과 사법적극주의'로, 이후 보완하여 1983년에 첫 저서 <미국의 헌법과 연방대법원>을 출간한다. 1991년 한겨레 기사에 따르면 한병채 헌법재판소 전 재판관이 이상돈 교수의 서울대 석사학위 논문을 34군데 이상 표절하고 각주까지 여러 군데 훔쳐갔다는 의혹을 받았고, 이에 이상돈 교수가 한병채 헌재 재판관을 상대로 한 저작권분쟁조정신청을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에 제출해 큰 이목을 끌었다.

‘한겨레’는 “(한병채 재판관의 논문에는) 이상돈씨의 석사논문을 한 두쪽씩 거의 그대로 옮겨 쓴 곳이 여러군데 눈에 뜨인다”, 또 “학술논문이 다른 자료를 인용할 때는 각주를 붙여 문헌명을 밝히는 것이 관례인데 한벙채씨의 논문에는 물론 이상돈씨의 이름이 한 군데도 언급돼 있지 않다”면서 이상돈 전 위원의 논문 표절 시비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당시에 이상돈 전 위원은 "나 개인의 피해를 보상받고 싶은 것은 다음 문제다. 우리 사회의 지도적 인사, 특히 국민이 헌법적 권리를 의탁한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윤리문제를 심판대에 올리고 싶다"면서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를 넘어 법정에도 이 문제를 가져갈 뜻을 '한겨레'를 통해 밝히기도 했었다. 이후 이상돈 전 위원은 2013년도에 'MBN'과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논문 표절 스캔들이 결국 한병채 재판관 측에서 공식 사과하고 배상을 한 것으로 마무리됐었다며 관련 비화를 전했다.

석사 졸업 이후 해군 장교로 입대하였다. 1976년 7월 임관되어, 1979년 7월까지 복무했다. 전역 후 미국 유학 길에 올라, 1980년 5월에 튤레인 대학(Tulane University)에서 법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1981년 5월 마이애미 대학(The University of Miami)에서 국제법과 해양법을 공부하여 비교법학석사를 받았다. 다시 튤레인 대학을 돌아와서 공부한 끝에 1983년 1월에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논문은 '해저석유개발에서 발생하는 해양오염의 법적 문제'이다.

1983년 9월부터 중앙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를 역임하였고, 2013년 2월에 퇴직후 현재는 명예교수이다. 

1995년~2003년 간 조선일보 비상임 논설위원을 지내면서 사설과 무기명 칼럼 430여건을 집필하였다.

2007년 대통령 선거 기간 이회창 캠프에서 기획단 멤버로 일하였다. 당시 기획단장은 강삼재 전 의원이었고, 위원은 권선택 국민중심당사무총장, 최한수 건국대 교수, 이용재 (관료 출신으로, 세종문화회관장을 역임), 허성우, 그리고 이상돈이었다. 기획단은 창당 발기인 대회를 준비하고, 인재를 영입하는 것이다. 

당시 이상돈 교수, 전원책 변호사, 류석춘 연세대 교수가 이회창을 지지하고 합류했다. 이상돈 교수는 이명박 후보를 막기 위해서 그 대안으로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자유선진당 창당 직후 공천 갈등과 신당을 창당하면서 사람을 무분별하게 이리저리 끌어모으는 행태를 비판하면서 전원책과 함께 탈당하였다. 

2011년 12월부터 2012년 5월 동안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을 역임하였다. 당시 박근혜 비대위의 개혁 3총사로 이상돈, 김종인, 이준석이 거론되었다. 2012년 대통령 선거 기간 새누리당 정치쇄신 특별위원을 지냈다. 이 기간 동안 이명박 정부와의 선긋기를 주문했고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대해서 전격 비판하고 친이계 용퇴론을 주장했다. 개혁적, 합리적 보수로 평가받으면서 박근혜 정권 총선, 대선 승리 공신으로 평가받았다. 물론 전통적 보수층과 친이계로부터는 공격을 받았다.

2016년 2월 2일 국민의당 합류를 발표하였고, 국민의당 선대위원장을 맡았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의당 비례대표로 출마한다. 당선 안정권으로 평가되는 4번을 배정받았으며, 당선되었다. 20대 전반기 국회에서는 본인의 전공인 환경법, 환경분야이기도 하고 4대강 사업 등에 대해서 비판운동을 벌여 왔기 때문에 환경노동위원회에 지원해서 배정되었다.

참여정부 시기에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을 앞장서서 비판한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고, 보수적 시민사회의 젊은 주자로서 주목을 받았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기 햇볕정책을 비판하였다. 이런 논설로 인해서 참여정부 일부 인사는 실제로 낙마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사학법을 전격 비판하였다. 그는 TV토론에 출연하여 "보수는 도덕"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당선이 거의 기정사실화 되가는 시점에 무소속 이회창 후보 지지선언을 하면서 정치활동에 뛰어들었다. 그 당시 이상돈은 한창 주목받는 신인 정치인으로 자유선진당의 중역도 맡을 뻔 하였으나 결국 성사되지는 못했다. 당시 이상돈은 이명박 후보는 선거에선 승리해도 실현 불가능한 한반도 대운하 계획 때문에 결국 국정운영에선 실패할 것이라 예상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MBC 100분토론에 종종 출연하였으며, 2009년 5월 11일 방영된 토론에서는 전원책 등과 함게 '한국의 보수' 논객으로 출연했다. 뉴라이트 성향으로 분류되거나 혹은 표방하는 지식인들과는 선을 긋고 그들을 비판하였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 그는 4대강 사업을 매우 집요하게 비판하였고 ‘4대강 사업 위헌·위법심판을 위한 국민소송단’ 공동집행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환경법 전문가로 4대강 정비 사업과 관련된 교수, 전문가, 공무원 등을 잘 안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일 때 그 사람들이 모두 눈치만 볼 뿐 입을 열지 않는 현실에 무척 당황해하다가, 무엇인가 깨달음을 얻은 듯 하다. 그 사람들이 선후배 관계나 지역 연고 등에 따라 똘똘 뭉쳐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배타적으로 보호받는 대신 정부의 실정을 앞장서서 감추고 있다며, 이는 일본의 조선 병탄부터 무려 100여년이나 이어지는 역사로 보인다는 의미심장한 말도 하였다. 

이후 개혁성향의 시민운동단체, 환경단체 및 진보인사와 교류를 시작하였고, 보수도 비판 받을 것은 비판 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보수진영의 모순적 언행을 직설적으로 지적했다. 2008년 촛불집회가 벌어졌을때 이를 비하하는 보수 인사들을 향해서 사립학교법 개정 때에 촛불을 든 자기들 얼굴에 침뱉는 격이라며 비난할 자격이 없다라면서 다른 보수논객과는 정반대 태도를 취했다. 2008년 말 두바이를 본받자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두바이는 왕조국가인데 왕조를 본받자고 하는 건 어리석다. 게다가 거기는 석유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아부다비에만 의존하기에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선견지명을 보이며 비난했다.

2011년부터 2012년 18대 대선까지 새누리당에서 비대위원으로 영입되어서 2012년 치루어진 19대 총선의 새누리당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비대위 시절 당시 이준석, 김종인과 함께 소위 '비대위 3인방'이라 불리며 한나라당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이명박 정부와의 차별화와 선긋기, 당의 노선 변화 등에 힘을 실어주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되면서는 박근혜 대선 정치쇄신특별위원을 지냈다. 대선정국에서도 김종인과 더불어 이한구 원내대표 용퇴 및 친박 주류의 2선 후퇴를 주장했고, 박근혜 후보가 인혁당 문제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 솔직힌 사과를 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박근혜 후보 당선에 큰 기여를 했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 된 뒤 그를 더 이상 찾지 않았고 입각 제의를 하지도 없었다. 2013년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직후부터 박근혜 정부에 대해서 서서히 비판적인 입장을 개진했다. 이상돈은 그 후 매체에 적극적으로 출연하여 박근혜 정부에 충고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박근혜측으로부터 전화 한통 받지 못했다. 2014년 12월 "결과적으로 토사구팽 아닌가?" 하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그렇다고 볼수 있다."고 대답하였다.인터뷰 한 때 인사문제가 불거졌을 때 그를 환경부 장관으로 기용하자고 하는 아이디어가 제시된 바 있지만 실현되지 않았으며, 2014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시절 새누리당 혁신위원회 위원장으로 영입을 타진했으나, 이미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에 대해서 기대를 버린 이상돈이 이를 고사했다고 한다. 

그는 점점 박근혜 정권의 행보에 실망하였고, 새누리당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도운 것을 후회하고 국민들에게 죄송하다는 발언을 하였다. 오마이뉴스 기사 "이런 박근혜 대통령 만들어 죄송합니다". 이후 언론을 통해 지속적으로 박근혜 정권에 대해 날선 비판하고 있다. 이런 행보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은 직접적으로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2014년 11월 이상돈 교수의 모친상에 조화를 보내지 않았고 새누리당 인사들도 빈소를 찾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관계가 상당히 틀어진 것으로 보인다."박근혜 정권은 무능한 정권으로 평가될 가능성이 높다",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에서 닉슨의 망령이 어른거린다", "숨만 붙어있는 식물정권"이라고 하는 등 비판의 수위가 굉장히 높다. 아무래도 본인이 박근혜 대통령 정권 수립에 일정부분 기여를 했었기에, 박근혜 정권에 대한 실망감과 회한이 더욱 큰 것으로 보인다.

2016년 2월 이상돈은 국민의당에 합류하였고, 총선결과 20대 국회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하게 되었다. 

손학규계 정치인으로 분류 되었던 이상돈이 2019년 4월 13일 손학규 대표를 향해 “제3정당 실험 실패를 인정하고 당을 ‘해산’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의원은 바른미래당의 실패 원인으로 '이질적 정파의 융합 실패' ,'정차자금·교섭단체 욕심' 으로 인한 억지 당 통합을 들었다.

당 내홍은 결국 ‘결자해지’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는 우선 “이렇게 된 것은 다 손 대표 본인의 책임”이라며 “제3정당 정치 실험 실패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안철수 전 대표 측·호남계·바른정당 출신 등 세 그룹을 이끌 리더십이 있었으면 됐겠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일갈했다.

이 의원은 결국 “손 대표는 계속 흔들릴 텐데 딱히 ‘수’가 있겠느냐”며 “정계를 은퇴하는 게 좋다. 하지만 또 그렇게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손 대표가 ‘자폭’하고 당을 해산하자고 해야 한다”며 “실험은 실패했다. 정당보조금은 국가에 반납하고, 비례의원들은 제명해서 각자 갈 길을 가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회법에 따르면 비례대표가 제명을 당하면 당적만 잃고 무소속으로 의원직을 유지한다.

그는 유승민·하태경·지상욱 등 바른정당계 의원들은 무소속으로 살아남든지 은퇴하든지 두 가지 선택뿐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 의원은 “민주평화당 창당도 대단한 것이다. 다행히 민주계는 ‘창당 기술자’들이 있어 가능했지만, 유 전 대표가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평화당이라는 호남이라는 모티브라도 있었다”면서 “유 전 대표는 ‘개혁보수’를 한다는 건데, 동력이 약하다”고 평가했다.

이상돈 국회의원 교수1
이상돈 국회의원 교수2
이상돈 국회의원 교수3
이상돈 국회의원 교수4
이상돈 국회의원 교수5
이상돈 국회의원 교수6
이상돈 국회의원 교수7
이상돈 국회의원 교수8
이상돈 국회의원 교수9

이상돈
1951년 12월 4일, 경상남도 부산시
천주교(세례명: 이냐시오 데 로욜라)
바른미래당

학력
툴레인 대학교 법학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 석사
서울대학교 법학 학사
경기고등학교

경력
제20대 국회의원
국민의당 최고위원
국민의당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
중앙대학교 법학연구소 소장
동아일보 동아광장 필진
중앙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조선일보 비상임논설위원
미국 로욜라대학교 로스쿨 객원교수
중앙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중앙대학교 부교수
중앙대학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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