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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제는 대한민국의 법조인 출신 정치이다. 6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자유한국당 소속이다.

1948년 12월 11일 충청남도 논산군의 가난한 집안에서 아버지 이윤식과 어머니 김화영 사이의 4남 2녀 중 3남으로 출생하였으나 서울특별시로 상경, 경복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였다. 서울대학교 졸업 이후 유신 반대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수사기관에 불려가 모진 고초를 겪고 군에 징집되어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했다. 

1979년 제21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81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어 1983년까지 약 3년간 재직하였다. 

1983년 변호사로 활동하며 노동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가 김영삼의 소개로 1987년 정계에 입문, YS정부 끝까지 같이 갔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의원으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당시 지역구는 경기도 안양시 갑. 현재 만안구 지역이다. 초선의원 시절, 노무현, 이해찬과 더불어 5공 청문회 스타 3인방 중 한 명으로 유명했다. 이후, 통일민주당 → 3당합당 때, 그대로 김영삼을 따라 민주자유당에 남았고,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도 같은 지역구에서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재선하였다. 이듬 해 1993년 김영삼의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만 45세 최연소 노동부 장관으로 기용되는 기록을 세웠다. 노동부 장관 시절 고용보험제도를 최초로 도입한 업적을 남겼으며, 과거 변호사 시절부터 실상을 잘 알고 있었던 산업현장을 찾아 다니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등 발로 뛰는 장관의 모범을 보여준 덕분에 당시 국민들에게 상당히 좋은 이미지로 각인되게 된다.

1995년 6월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경기도 도지사 선거에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 노동부 장관 시절의 좋은 이미지 덕분에 여유롭게 당선되면서 민주자유당의 후신인 신한국당에서 유력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하였고, 이런 명성에 힘입어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하며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게 된다. 경쟁 후보인 이회창의 압도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중반 이후부터 이회창을 압박할 정도로 급속히 부상하면서 1차 투표에서 2위를 기록하고 이회창과의 결선투표까지 갔지만 결국 이회창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당내 경선과는 상관없이 급속도로 성장세를 타던 자신의 독자적인 지지 기반에 부응하고자, 그리고 이회창이 아들 둘 모두 병역을 면제받은 것이 알려지면서 지지율이 자신의 지지율보다 낮은 상태로 계속 가자, 결국 같은 해 9월 13일 대선후보 경선 결과 불복을 선언하며 신한국당을 탈당하여,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국민신당 후보로 독자 출마, 19.2%를 받아 3위에 오른다. 사실 이 득표율은 소속정당의 지역기반 없이 오직 이인제라는 인물 하나만 보고 얻은 득표로서 대한민국 역사상 인물로 얻은 득표수로는 최고기록을 자랑한다.

이인제의 경선 불복 및 대선 출마 덕분에 보수 진영의 표가 분산되어 어부지리로, 자민련의 김종필과 이른바 DJP 연합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 출마 선언 후 상당 기간 여론조사 2위를 달리며 위력을 보였으나, 신생 정당은 기존조직과의 차이는 극복할 수 없었고, 이회창 측의 강력한 네거티브 공세로 인해 끝내 지지율이 뒤집히며 3위로 밀려났다. 만약 이인제가 대선에 출마하지 않았다면, 김대중이 아니라 무난하게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득표 1위 김대중이 40.3%였고 2위 이회창이 38.7%였다. 3위 이인제가 19.2%임을 감안하면 본인은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김대중 당선과 50년만의 평화적 정권교체, 2000년 이후 정치판도를 만든 1등 공신인 셈. 유시민은 저서인 <나의 한국현대사>에서 '이인제 씨는 선한 의도가 있어야만 선을 행할 수 있는것은 아니라는 삶의 역설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나는 텔레비젼에서 그를 볼 때마다 감사의 마음을 되새기곤 한다.'라며 조롱반 칭찬반의 평가를 내렸다. 

그런데 DJP 연합 이후 김대중은 선거일까지 여론조사 1위를 놓친 적이 없는데, 정식 후보 등록 후 여론조사 1위가 항상 대권을 차지했다는 점을 들어 양자 구도로 갔어도 김대중이 이겼을 것이라는 시각도 제법 많다. 특히나 1997년 대선 예측조사에서 이인제가 청년층들에게 많은 표를 얻었고 중장년층에게 표를 적게 받았으니 당시의 이인제가 보수표만 긁어갔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김대중의 이미지가 청년층들에게도 호불호가 갈렸던탓에 1당도 2당도 싫다는 사람은 지금보다 당시가 더 많았고, 지금이야 당을 나와도 양진영으로 구분되어버리지만, 당시에는 분명 중간에 위치하는 포지션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김종필과 손잡은 것이 싫어서 이탈한 표도 많이 흡수했다. 이를 반증하듯이 1997년 대선 투표자조사결과를 보면 이인제가 20대와 30대 층에게 득표를 많이 얻었던것을 알수있다. 그러나 이인제가 흡수한 표는 결속력이 단단한 호남표 보다는 다소 느슨한 그 외 지역의 표로 봐야 한다. 선거운동 당시 '리틀 박정희'를 자처하며 보수층의 지지를 호소했으며, 이회창 후보 측에선 이인제 후보에 대한 투표는 사표(死票)가 된다며 후보사퇴를 종용해 많은 물의를 낳기도 했다.

이인제의 경선불복과 대권행보가 단순히 이인제 개인의 정치적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그의 정치적 스승이었던 김영삼의 의중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실제로 이회창의 최측근인 서상목전 장관은 당시 이인제를 따라 신한국당을 탈당한 홍재형 의원이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이인제 지지와 거리가 멀었던 중립인사였다는 것을 예로 들면서 김영삼 대통령이 이인제를 암묵적으로 지지했다는 음모론을 펼치기도 했다.

당시 김영삼은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국무총리 및 당대표로 있었던 이회창과 껄끄러운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되던 상황이었는데, 자신이 대통령이 되고 난 후 과거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에서 껄끄러운 관계로 말이 많았던 노태우를 4000억 원 비자금 조성 및 12.12 군사반란 혐의 등으로 내쳤듯이, 이회창이 대통령이 될 경우 본인 또한 퇴임 후에 정치적으로 크게 다칠 것을 고려하여 이인제를 은연 중에 부추겨 이회창의 대권을 막게 한 것이라는 논지이다. 사실 이인제의 경우 1997년 대선 당시 나이가 만 49세로 상당히 젊은 축에 속했기 때문에, 앞으로 차기 대권에서도 기회가 많았던 것을 감안한다면 어느 정도 일리있는 논리였다.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3후보 모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당시 이회창은 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대해 대선 전에 사면해 줘야된다고 10월 6일, 인터뷰에서 밝혔으며이회창 후보 집권 땐 권력구조 개편, 전두환 노태우 대선 전 사면 이인제도 12월 16일, 자신이 당선되면 빠른 시일 내에 전두환 노태우를 사면하겠다고 공약으로 내세웠다.

1997년 대선 당시엔 대선 후보로서는 최초로 독도를 방문하여 독도에 대한 정부의 미온적 대응을 비판했다.  

15대 대통령 선거 이후에도 약 8개월간 이만섭과 더불어 국민신당을 지켰으나, 1998년에 치러진 4월 재보선, 2회 지방선거, 7월 재보선 등 연이은 선거에서 국민신당은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지방선거에서는 이인제의 고향인 논산시에서 시장을 배출했을 뿐이었다. 한편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 자유민주연합 연정 역시 의석 수 부족 및 차기 정치 지도자 부재를 통감하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 눈에 들어온 것이 국민신당과 이인제였다. 1998년 8월 29일, 국민회의는 국민신당과의 합당에 합의하면서 이인제의 세력도 받아들여, 이인제는 일약 여권의 유력 대선 주자로 떠오르게 되어 속칭 이인제 대세론을 이루게 되고 다음 대선에서는 이회창vs이인제의 구도가 확실시 되는 상황이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를 마다하고 자민련의 텃밭인 고향 논산에 출마, 현역 김범명 의원을 꺾고 당선되면서 그의 주가는 최정점에 달했고, 16대 대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대선후보로 가장 대세였으나, 이인제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노무현이 국민참여경선 과정과 영남 후보 대세론까지 더해지면서 드라마틱하게 승리하였기 때문에 15대 대통령 선거와는 달리 대통령 후보가 되지는 못했다. 여기서 승복하지 않은 것은 이인제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본래 이념적으로 우파 기질이 강한 이인제를 당시 여당이던 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추대하는 데 대한 문제점과, 김영삼 때와 마찬가지로 김대중 퇴임 이후 혹시나 모를 위험 탓에 세력을 동원하여 노무현을 당선시켰다는 다소 그럴 듯한 설도 존재한다.

이후 민주당 내에서 노무현 후보 낙선운동에 나섰으나, 노무현이 승승장구하자 결국 노무현 취임 이후 불법정치자금 수수혐의로 구치소 신세를 지기도 했고 후일 대법원에서 완전무죄 판결을 받기도 했다.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이후 여러 정당을 떠돌면서 매번 아슬아슬한 격차로 당선되며 피닉제라는 애칭을 얻었으나,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김종민 후보에게 예상 밖의 역전패를 당했다.

19대 국회의원 임기가 종료되고 나서는, 국내 로펌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잠시나마 정계와는 거리를 뒀다.

2016년 12월, 박근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 통과된 이후로 잠잠하던 친박에서 50여 명이 심야회동을 하며 혁신과통합연합이라는 모임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김관용 경상북도도지사, 피닉제이인제 전 의원이 공동대표로 결정됐으며 친박계 국회의원 51명이 참여했다. 이 회동에서 친박계 의원들은 박근혜 탄핵을 주도한 유승민, 김무성 의원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새누리당 분당 가능성이 한층 커졌다.

 

2016년 12월 12일 이인제는 19대 대선출마를 공식선언했다. 새누리당 분당시에는 대선후보를 내기는 내야하니 새누리당 골수 지지층 사이에서 지지율이 오르고 있는 황교안이 권한대행을 사퇴하고 새누리당 경선에 출마하지 않고 홍준표를 경선에서 이기거나 홍준표가 출마를 포기한다면 후보로 선출될 가능성은 높다. 그러나 박근혜를 옹호하는 행적으로 인해 친박세력이 새누리당에서 개명한 자유한국당을 차지하고 박근혜 지지층만을 안고 가서 텃밭이라도 지키는 순장조의 길을 택했기 때문에, 이에 실망한 기존 새누리당 지지층은 박근혜 지지층을 제외하면 다른 정당으로 가거나 부동층으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당선 가능성은 없었다.

결국 자유한국당 19대 대선 후보 경선에서 당원 4위(5.1%) 여론조사 2위(24.6%)로 합계 3위(14.85%)로 대선후보가 되는 데는 실패했다. 전례와는 다르게 탈당은 안하고 잔류하여 자유한국당 공동 중앙선대위원장으로 선출되어 후보로 추대된 홍준표의 선거운동을 돕게 된다. 여담으로 경선 탈락에 승복하여 자신을 경선에서 이긴 후보자의 선거 운동을 돕는 경우는 이인제의 30여 년 정치 인생에서는 처음이다.

자유한국당의 대선 패배 이후에는 별 다른 행보를 보이지 않고 조용하게 지냈으나, 2018년에 안희정의 불출마 선언으로 공백지가 된 충청남도지사 후보나, 대법원 판결로 의원직을 상실한 박찬우 의원의 천안시 갑 선거구 후보로 물망에 오르고 있다. 그러나 충청남도지사는 20년 전에 경기도지사를 이미 해 본 경력이 있는 그에게 큰 메리트가 없다는 의견이 대부분이고, 천안시 갑에 보궐선거로 진출해 차기 국회의장직을 노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당에서는 성일종 도당위원장 등 지도부가 계속 충남지사 출마 압박을 넣고 있고, 천안시 갑에는 길환영 전 KBS 사장을 전략공천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어떻게 될지는 미지수 였으나 결국 당의 충남지사 출마 요구를 받아들였다.

2018년 6월 치뤄진 충남지사 선거에서 35.1%의 지지율을 획득, 더불어민주당 양승조 후보(62.6%)에게 큰 표차이로 밀리며 낙선했다.

2019년 5월 21일 이인제 전 의원(자유한국당)이 보수통합을 내세우며 내년 4·15 총선 출마의사를 밝혔다.

이인제 전 의원은 이날 논산시청 출입기자단 화요저널리스트클럽과의 오찬을 갖고 “모든 걸 내려놓고 시민들 뜻을 잘 받들 수 있는 길을 찾겠다”고 말했다.

이어 “난세를 바로잡으려면 보수 세력이 결집해야 한다”며 “자신이 이런 역할을 하겠다”고 말해 자유한국당 소속으로 내년 총선 출마의지를 피력했다.

이는 지난해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한국당 소속 지방의원 공천 잡음으로 분열된 보수 세력을 결집하기 위한 포석으로 풀이된다.

이인제 전 의원은 “보수는 시대적 변화에 따라 개혁적 보수로 변화하고 있지만, 진보는 시대적 흐름과 다르게 극단적으로 나가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금산군의 화상경마장 유치와 관련해 “주민들 간 의견 대립으로 마찰이 생기는 건 군을 위해 좋지 않다”며 “주민투표를 통해 민주적으로 결정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이인제 전 의원 출마 시 한국당 박우석 논산·계룡·금산 지역 조직 위원장과 공천경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인제
1948년 12월 11일, 충청남도 논산시 부창동
자유한국당 상임고문

학력
백석국민학교 졸업
논산중학교 졸업
경복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사

경력
한국UN봉사단 총재
자유한국당 상임고문
대한민국 국회의원
새누리당 최고위원
선진통일당 당대표
자유선진당 비상대책위원장
민주당 상임고문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국민신당 상임고문
제29대 경기도지사(민선 1기)
제10대 노동부장관
통일민주당 대변인
대전지방법원 판사
제21회 사법고시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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