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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불암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국민 아버지로 유명한 국민배우이자 수사반장, 전원일기로 대표되는 전설적인 장수 드라마들을 주인공으로서 이끌었던 대배우이다. 과언이 아니라 1970 ~ 1980년대 한국 TV 드라마계에서 이 분을 제외하면 설명이 불가능 할 정도의 큰 존재감을 자랑했다. 현재 80에 가까운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밥상을 비롯한 방송에 모습을 드러내며 어린 시청자들에게도 상당한 인지도를 자랑한다.

연기 외에 최불암 시리즈로도 유명한 배우. 최불암이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처음에는 최불암 시리즈를 좋게 여기지 않았으나 몇몇 에피소드들을 몇 차례 접하면서 '사람들이 그만큼 나를 친근하게 느끼고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재미있다'라고 생각하여 호의적으로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출판사에서 최불암시리즈 출판을 위해 집에 찾아왔을 때도 흔쾌히 허락해 주었으며, 입시에 시달리는 학생들이 웃고 힘을 낼 수 있게 저작권도 무상으로 줬다고 한다. 최불암 시리즈가 한창 인기를 끌때 일밤에 출연해 최불암 시리즈 꽁트에 본인이 본인 역을 맡아 철저히 망가지는 모습도 보여주기도 했다. 

비슷한 경위로 유명세를 얻은 척 노리스와는 동갑(1940년생)이다. 이 외에 이주일, 이소룡 등과도 동갑이다.

1940년 6월 15일 인천광역시 동구 금곡동에서 사업가인 최철(崔鐵)과 대한제국 때 궁내 악사를 지낸 집안의 딸 이명숙(李明淑)의 무녀독남 외아들로 태어났다. 

최불암의 가족 중에는 독립운동가가 많았다. 그의 아버지는 최불암을 임신한 모친을 국내에 두고 독립운동을 하는 형제들을 따라 중국으로 들어갔고, 해방이 될 때까지 중국에서 사업을 해 큰돈을 벌었다. 그 후 해방이 되고 나서 만주에서부터 인천까지 말을 타고 귀향했다. 말안장에는 돈과 보석이 잔뜩 실려 있었다고.

최불암의 부친은 만주에서 가져온 돈으로 해방 직후 인천에 영화사(건설영화사)와 신문사(인천일보)를 차렸으나 직접 제작한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부친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당시 6살에 불과했던 최불암은 부친의 영정을 들고 영화 시사회에 참석해야 했다. 

모친 이명숙 여사는 서울 명동에서 '은성'이라는 대폿집을 열었다. 그곳은 금방 당대 문화인들의 사랑방이 됐다. 그 곳을 드나들던 문인 중 소설가 이봉구는 특히 명동백작이라 불렸는데, 부잣집 아들인 그가 은성에 술자리를 마련하면 서점을 운영하던 박인환(시인)과 가난했지만 멋진 시들로 인기가 많았던 김수영(시인) 등이 모여 많은 일화를 만들어낸 곳이다. 봉구주점이란 별명까지 있었다고 한다. 은성주점 터는 현재 표지석이 설치돼 있다. 최불암은 단골이었던 당대 문화인들과 대화에 끼기에는 아직 어렸지만, 그의 인생에 있어 예술에 대해 알려준 곳임에는 틀림없었다. 최불암의 개인사적 다큐멘터리마다 어머니를 추억하며 은성주점 터를 찾는 모습이 가끔 텔레비전에 비친다.

대중들에게는 주로 텔레비전에 많이 출연하는 배우라는 인식이 많지만, 젊었을 적에는 주로 연극 무대에서 활동했다. 원래는 연출을 전공했으나, 자기가 연출을 맡은 연극의 배우가 연기를 못하자 그 대타로 뛴 것이 연기 인생의 시작이었다. 특히 1959년에 극단 '실험극회'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공연했을 때 타이틀 롤로 출연하기도 했는데, 당시 한국에서 햄릿을 연기한 최연소 배우였다고 한다. 다만 평이 안좋았는지 자신이 성에 안찼는지 공연 끝나고 자진 입대 했다고 한다. 원래는 외아들이라 군대 안 가도 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연극배우 시절에는 별로 유명세를 못 탔다. 당시는 외모가 연극배우의 척도 중 하나였는데, 거기에서 마이너스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문에 한때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다고 한다. 1967년 27살의 나이에 KBS 2기 탤런트로 데뷔하여 처음 맡은 역할이 김종서 장군, 그것도 계유정난 당시의 노년 역할이었다. 이후로 줄곧 노역으로 승부수를 던지게 되었다고 한다. MBC에서 방영된 제1공화국, 제2공화국에서는 아예 이승만 역할을 맡아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제2공화국은 그렇다 치고, 제1공화국 당시에는 40세의 나이에 80대였던 이승만 역을 맡았다.

1969년에 MBC가 개국하자 그쪽으로 옮긴 후에 대박을 많이 터뜨렸고 스타가 되었다. 현재는 다른 방송국 드라마에도 많이 출연하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도 거의 MBC 전속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최불암 시리즈 중에서 터미네이터가 방송국에 쳐들어왔는데 경비가 '야 여긴 KBS야 MBC가서 찾아봐'라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드라마 외에는 KBS의 좋은나라 운동본부에 반고정 패널로 장기출연했으며, 그 덕분에 즐겨 피우던 담배도 끊었다.

전원일기(22년간 방영), 수사반장(18년간 방영) 등 국내 드라마의 전설이다.

2004년에는 비슷한 연배의 배우인 오지명, 노주현과 함께 코믹영화 까불지마를 찍어 새로운 도전을 하기도 했다.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끝없는 도전에 박수를 보내는 사람이 많다. 

전원일기 때운에 김혜자와 부부인 것으로 착각하시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실제로는 김민자가 부인인데, 이 분 역시 탤런트이다. 결혼 전 최불암이 편모 가정에 외아들인데다 직업이 배우라 반대가 무척 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민자와 가까워질 생각으로 김민자가 있던 KBS로 이적했을만큼 공을 들인 끝에 결국 결혼에 성공했다고 한다.

1981년에 만화 주제가를 부르기로 유명한 정여진와 함께 듀엣으로 "아빠의 말씀"이라는 음반을 낸 적이 있다. 아빠 언제 어른이 되나요~ 로 시작하는 도입부를 들으면 바로 이해가 될 정도로 유명했다. 90년대 중순 MBC에서 하던 만나보고 싶습니다라는 프로그램에 나와서 정여진이 지금 어찌 지내는지 궁금하다면서 그 시절을 회상한 바 있다. 그리고 당시 앨범을 내는 준비를 하던 정여진 가 나와 인터뷰와 같이 최불암과 16년만에 만나기도 했다.(참고로 당시 정여진이 준비하던 앨범이 바로 최진실이 나온 영화 주제가 편지 OST)

차마고도, 한국인의 밥상 등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을 맡기도 했고 아마게돈 애니메이션 나레이션도 맡은 바 있다.

 


최불암 ( 본명 최영한 )
1940년 6월 15일, 일본령 조선 경기도 인천부 금곡정
171cm, 75kg
천주교(세례명: 프란치스코)
제14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학력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졸업
서라벌예술대학
중앙고등학교
중앙중학교

경력
1959년 연극배우 첫 데뷔
1965년~1967년 국립극단 단원
1966년 MBC 문화방송 라디오 드라마 첫 출연
1967년 서울중앙방송(현재의 KBS 한국방송공사) 공채 탤런트
1969년 MBC 문화방송 특채 탤런트
1972년 경찰청 명예경감
1977년 경찰청 명예경정
1981년 ~ 한국복지재단 후원회 회장
1985년 극단 현대예술극장 대표 총단장
1990년 한국지역사회교육중앙협의회 이사장
1992년~1996년 제14대 국회의원
1997년 호서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겸임교수
1998년 서일대학 방송연예학과 겸임교수
1998년 서울특별시 홍보대사
1998년 '웰컴 투 코리아 시민협의회' 회장
2007년 세명대학교 방송연예학과 초빙교수
2007년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전국후원회 회장
2007년 여수세계박람회 명예홍보대사
2008년 불교에서 천주교로 개종
2008년 다문화가족사랑 걷기 모금 축제 대회장
2008년 서울드라마페스티벌 명예의 전당 올해의 스타 헌액
2009년 2014 인천아시안게임 홍보대사
2009년 한우 홍보대사
2009년 무한돌봄 홍보대사
2010년 한국주택금융공사 홍보대사
2010년 민선5기 서울시 홍보대사
2012년 청소년 흡연 음주예방 홍보대사
2012년 경찰청 명예총경
2012년 귀농귀촌 100인 자문단
2012년 경기도 살리고 농정 홍보대사
2012년 식사랑 농사랑 대국민 프러포즈 행사 홍보대사
2012년 희망서울 홍보대사
2013년 여수시 홍보대사
2013년 제11회 지상군 페스티벌 홍보대사
2018년 경찰청 명예경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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