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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은 대한민국의 최고 남자 트로트 가수 중 한명이다. 오빠부대의 원조격이라 불릴 정도로 높은 인기를 얻었다. 데뷔 50주년을 넘긴, 70대인 현재도 현역으로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나훈아와 쌍벽을 이룬 가수이다.

 


원래 스탠다드 팝과 엘비스 프레슬리의 록큰롤 창법을 선호했고, 선이 굵은 저음의 남자다운 보이스를 가지고 있다.

 


90년대 두번째 컴백 이후로는 나이도 있고 해서 트로트 곡 위주로만 발표했지만,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최전성기에 트로트와 로커빌리 로큰롤을 오고 가면서 다양한 장르를 소화했다. 또한, 엘비스 프레슬리를 깊게 의식하여 엘비스를 벤치마킹 한 것도 유명하다. 그래서 그가 부르는 트로트는 다른 트로트 가수들에게서 나오는 뽕끼가 없어서 지금 들어도 중후하고 세련된 느낌이 든다.

 

비슷한 시기의 인기가수 나훈아와 여러면에서 상반된 이미지로 활동했는데, 나훈아가 시골의 정서나 고향의 향수를 노래했다면, 남진은 철저히 도시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나 도시의 느낌을 다룬 노래로 유명했다. 또 나훈아는 선원인 아버지를 둔 부산의 평범한 집안이었고 남진은 목포의 부유한 집안이라는 출신의 차이도 있다. 나훈아가 프로필에 자신의 생년월일을 1947년 2월 11일이라고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1950년생이라고 주장하는 등 아직도 애증이 남아있다. 오죽하면 신문에서도 두 사람을 대놓고 비교하는 칼럼을 시리즈로 실으면서 두 가수 팬덤간의 견제와 싸움을 부추겼다.

 


전체적으로 남진은 저음의 목소리에 수려한 외모를 가진 타고난 슈퍼스타로서 높은 대중성으로 가요대상을 매년 수상했고, 나훈아는 투박한 외모에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가졌다. 지금은 라이벌로 비교 되는 2명이지만 남진이 인지도를 얻게 된 것은 나훈아보다는 한참 앞서고 라이벌이라고 불리게 된 건 1970년대에 들어서이다.

 


현재는 가수로서만 기억되지만 원래 영화배우를 지망한 연극영화과 출신이었고, 전성기에는 수십편의 영화에 출연한 영화배우다. 출연작을 보면 외모로 여느 남자배우과 비교해도 빠지지 않는다.

 


전라남도 목포에서 목포일보의 발행인이자 제5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문옥의 늦둥이 장남으로 태어난 남진은, 부유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부터 연극 음악에 심취했다. 중학교때부터 닐세다카 나 폴앵카등의 팝송을 즐겨 불렀던 그는 고등학교때 서울로 전학하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레스토랑에서 팝송을 불러 밴드마스터에게 가수 제의를 받게된다. 그 후 아버지는 반대했지만 대학도 연극영화과를 진학해 영화배우로서의 꿈을 꾸었다. 남진의 집안이 목포에서 상당히 부유한 집안이였는데, 경찰관들이 자전거를 타고 순찰을 돌던 시절에 일본산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에 등하교를 했다고 한다. 

 


레스토랑의 밴드 마스터로부터 당시 최고 인기가수 남일해의 곡을 만들었던 작곡가 한동훈을 소개 받고, 그로부터 자신의 음악학원에 등록하고 연습생 생활을 할것을 제의 받는다. 영화배우의 길을 꿈꿨던 그 였지만 당시 순전히 학원에 있던 여학생이 이뻐서 등록을 하고 연습생겸 연애 생활을 시작한다. 불과 몇개월 후인 1965년 드디어 첫 음반을 레코딩 하게 된다. 데뷔곡은 한동훈이 작곡한 ‘서울 푸레이보이’라는 스탠다드 팝을 연상시키는 곡이었지만 철저하게 폭망하자 실망한 그는 낙향했다.

 


다시 작곡가 한동훈이 당시 오아시스레코드사의 전속가수 제안을 하고, 두번째 음반을 발표했으며 첫번째 음반과 달리 방송에도 제법타고 히트 바로직전 까지 갔지만, 당시 노래 제목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국가에 의해 금지곡 처분이 되었다. 금지곡이 된 타이틀 곡명은 '연애 0번지'.

 


두번째 음반도 실패를 하자 그는 다시 고향 목포로 낙향하여, 술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의 어머니가 두번째 앨범에 담긴 다른 곡인 '울려고 내가 왔나'라는 트로트 곡을 밀면서 이 곡으로 다시 도전할것을 권유했다. 이 곡은 2집 레코딩 중 작곡가인 김영광이 남진에게 부르게 했으나, 남진이 트로트 부르기가 창피 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던 곡이었다. 이에 김영광이 그래도 노래가 아까우니 내가 불러서 곁다리로 음반 맨 끝에 넣겠다 라고 했으나, 그가 사정이 생겨 녹음 시간에 오지 못하게 됐다. 어쩔수 없이 곡 수는 채워야 했기에 남진은 내키지는 않지만 녹음해서 앨범 맨끝에 집어 넣었는데 이 곡이 그야말로 대 히트를 치면서 남진이란 이름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게 된다.

 


트로트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트로트 곡으로 이름을 알린 그는 이듬해인 1966년 박춘석이 작곡한 '가슴아프게' 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면서, 그 해 MBC 신인가수상을 수상했다. 이때부터 남진은 영화배우로도 대활약 하게 되며 가요계와 영화계를 넘나드는 빅스타의 자리에 올랐다.

 


그 후에 나온 로커빌리 스타일의 불멸의 히트곡인 '마음이 고와야지' 는 그를 단순히 트로트 가수로만 국한 시키지 않고, 가요계의 독보적인 캐릭터로 인정 받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잘생긴 얼굴,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모방한 창법과 무대 액션에 당시의 소녀 팬들은 열광하기 시작했고, 이 는 그 후 '그대여 변치 마오', '님과함께' 같은 대표곡으로 이어졌다.

 


한창 인기를 누리고 있던 때인 1969년에 해병대에 입대했고 이후 베트남전에도 파병되었다. 남진이 무릎팍도사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원래 1년간 파병가기로 되어 있었지만 귀국해서 베트남에서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는 것은 대한남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여단장에게 부탁해서 2년간 파병생활을 하게 됐다고 한다. 수많은 동료들의 전사를 겪으면서 사람은 죽으면 다 똑같다라는 사실이 와 닿았다고 한다. 언론에 나온 월남전에 파병된 남진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파병초기에 촬영된 것이라고 한다. 베트남의 날씨가 너무 더워서 나중에는 군복을 제대로 입을 수 없었다고 한다. 남진의 인터뷰에 따르면 베트남에서 몇 차례 죽음의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고 한다.

 


근데 남진이 월남전에 파병된 실제 이유는, 해병대 입대 후 군무를 완전히 이탈하여 자기 집에 돌아가 평소처럼 집에서 지내며 연예활동을 계속 하는 등 어처구니 없을 정도의 군복무위반 비리를 저지르다가 군 수사당국에게 들통나서 그 벌로 베트남에 강제로 보내진 거였다고 당시엔 보도됐었다. 남진 외에도 진송남, 박일남 등 당시 해병대 소속이던 10여명의 연예인들이 해병대 간부들의 비호 아래 모두 그런 혜택을 봤던 조직적인 비리였다. 베트남에서도 실은 전투병이 아니라 오늘날의 용어로 치면 연예병사로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저 사건에서 해병대 복무 중에도 집에서 지내고 왔다갔다 하며 자유롭게 연예활동을 한 것은 남진 등 해당 연예인들이 군율을 어기는 잘못을 한게 아니라 해병대측의 약속과 비호에 따른 행위였을 뿐이었다. 애초에 해병대가 군복무 중에도 계속 연예계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걸 약속하고 그 조건으로 스타들의 "해병대 연예대" 입단을 추진하여 해병대 연예부대의 구성원을 유명스타들로 빵빵하게 채운 것이었다. 즉 유명 연예인들을 해병대로 데리고 오기 위해 파격적인 조건과 대우를 걸고 스카웃한 것이었다. 근데 모 신문사 회장이 자기 딸의 생일파티에 당시 해병대 일병이던 남진을 포함한 연예병사 5명을 초청했지만 군인 신분에 사적인 초대이기에 거절했고, 이에 신문기사를 통해 군복무 중에도 사회에서 연예계 활동을 계속 해왔던 것을 폭로하는 보복성 기사를 보도한 것이었다고 박일남이 티비쇼에서 밝혔다. 해병대측이 당초 약속하여 보장한 바에 따른 연예인 활동이었을 뿐이었다는 원인 내용은 쑥 빼버리고 자유로운 사적생활과 연예계 활동을 했다는 결과만 폭로한 이 보도가 나가서 남진 등의 연예인과 해병대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해병대 고위간부들이 국내 연예활동을 보장했던 당초의 약속을 뒤집고 베트남으로 파병시켜버린 것이었다. 

 


최고의 순간에 군대행을 택하고 해병대의 모습으로 월남전까지 갔다 온 그는 묘하게도 그가 벤치마킹한 엘비스 프레슬리의 행보와도 매우 닮아 있었다. 엘비스는 1950년대 후반 로큰롤 음악이 기성 사회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몰락 위기에 빠지자, 군대에 자원 입대하여 이미지 쇄신을 노린 바 있다. 그 이후 G.I. Blues라는 곡과 동명의 영화를 발표하면서 "성실한 미국인 젊은이"의 이미지로 거듭났다. 남진 역시 엘비스의 G.I. Blues를 한국어로 번안하여 불렀다. 그리고 1973년 하와이 공연때 엘비스가 입었던 점프수트를 매니저가 직접 미국까지 가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매니저를 직접 만나서 구해온 것도 유명하다

 


71년 군 제대후 국내에 돌아와 보니, 자신의 영혼의 파트너 박춘석이 라이벌 나훈아와 손을 잡고 '물레방아 도는데' 등의 히트곡을 쏟아내는 중이라 이쪽과의 협력은 접고 다른 파트너(남국인)를 찾아 곡을 받고 다시 정상의 반열에 서게 되는데 그 노래가 바로 남진의 최고 히트곡 중 하나인 "님과 함께"였다. 제대후에 더욱 폭발적인 사랑을 받게 된 그는 국내 가수 최초로 서울 시민회관에서 귀국 기념 공연을 열었고 컴백 4개월만에 TBC 남자가수상과 MBC 최고 가수상에 오른다. 

 


언론은 그의 컴백과 더불어 당시 촉망받는 신인인 나훈아와의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초기 3년간은 남진이 내리 3연속 가수상을 타며 나훈아를 완전히 압도했다.

 


1976년에 윤복희와 결혼하여 화제를 끌었지만 1979년 법적 이혼을 하고 1980년대 신군부의 등장으로 조직적으로 탄압받으며 미국으로 가게 된다. 조용필 등 후진들이 치고 올라온 탓도 있다. 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거는 한참 나중 일이고, 김대중과 친분이 있는 집안 자손이라는 이유로 아예 방송 출연을 금지시킨 탓이 훨씬 크다. 김대중이 학생 때 남진 아버지가 운영하던 목포일보에서 사장상을 받았고, 그 외에도 남진 아버지 덕을 많이 봤다고 한다. 목포에 내려가면 항상 남진 아버지 집에 묵었다고. 1990년대에 국내로 다시 복귀했다.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세대에겐 가수만로 알려져서인지 오랜만에 영화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 집창촌 부근 성당의 욕쟁이 주임신부 역할로 출연하자 "남진이 영화에도 나온다"는 얘기가 돌았는데, 이미 전성기이던 1970년대에 히트곡의 이름을 딴 님과 함께 등 수십 편의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어서 가수 겸 배우라고 해도 문제가 없다. 물론 잘 생긴 얼굴과 큰 인기 덕에 영화에도 나온 거고 배우로서는 연기가 좋다고 할 수 없어 별다른 성과가 없긴 하였지만. 나훈아도 인기빨로 연기를 몇번 한 적 있는데, 이 두 사람은 '어머님 생전에(1973년)'같은 영화에 나란히 출연하기도 했다. 

 


1989년에 조폭에게 칼로 허벅지를 찔리는 큰 부상을 입었으며, 지금도 한쪽 다리가 불편하다고 한다. 허벅지에는 큰 동맥이 지나가는 곳이라, 조금만 옆으로 맞았으면 그 자리에서 사망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현재에도 방송에서 다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00년에 낸 "둥지"가 대표적이다. "신비주의" 컨셉의 나훈아와 대비된다. 2008년 이후 나훈아가 모종의 섹시코만도 바지 사건 이후 활동을 중단하면서 최근 더욱 두드러진다. 본업인 가수로서 각 지방 공연은 현재에도 쉬지 않고 꾸준히 하고 있다.

 

2019년 6월 19일 가수 남진이 후배 나훈아와 선의의 경쟁 덕분에 인기를 얻었다고 밝혔다.

19일 방송된 SBS 파워FM '두시탈출 컬투쇼'에서는 남진이 게스트로 출연했다.

DJ 김태균은 "데뷔 55주년을 축하한다"며 "나훈아와 양대산맥이 맞냐"고 질문했고, 이에 남진은 "나훈아가 나보다 4, 5년 뒤에 데뷔했다"고 답했다.

이어 남진은 "당시 나훈아와 양대산맥이었기 때문에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멋진 파트너"라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남진 ( 김남진 )
1945년 9월 27일, 전라남도 목포시
O형
개신교 → 불교 → 개신교(장로회)
트로트 가수

학력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목포고등학교 졸업
경복중학교
목포북교초등학교

경력
2017 제8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2014 제13회 대한민국 전통가요대상 남자가수부문 대상
2012 제12회 대한민국 전통가요대상 가수 부문 대상
2012 제12회 대한민국 전통가요대상 남자 7대가수상
2011 제11회 대한민국 전통가요대상 공로대상
2007 제22회 골든디스크상 공로상
2005 문화관광부 보관문화훈장
2000 KBS가요대상 공로상
1973 MBC방송국 10대가수선정 가수왕
1973 TBC방송가요 남자가수상 대상
1972 MBC방송국 10대가수선정 가수왕
1971 TBC방송가요 남자가수상 대상
1971 MBC방송국 10대가수선정 가수왕
1971 한국무대예술상 그랑프리 대상
1969 TBC방송가요 남자가수상 대상
1961 MBC방송 신인상

대표곡
마음이 고와야지
나에게 애인이 있다면
님과 함께
가슴 아프게
울려고 내가 왔나
둥지
빈 잔
너와 나
미워도 다시 한번
내영혼의 히로인
모르리
우수
김포가도
빗 속에서 누가우나
목화 아가씨
빈 지게
나야 나
이력서
그대여 변치마오
파트너
당신이 좋아(with 장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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