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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며 제20대 국회의 대구광역시 동구 을 지역구의 국회의원으로 바른미래당 소속이다. 바른정당 소속으로 제19대 대선 후보로 출마했다.

1958년 경상북도 대구시 삼덕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에서 아버지 유수호와 어머니 강옥성 사이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삼덕초등학교, 대륜중학교, 경북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위스콘신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2000년 2월에 한국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으로 있다가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의 영입으로 한나라당의 정책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의 소장을 맡으면서 처음으로 정치권에 들어오게 되었고 2004년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초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후 20대 총선까지 내리 4선에 성공했다. 20대 국회 기준으로 지역구는 대구 동구(을)이다.

박근혜와는 2005년 1월에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 대표의 비서실장으로 내정된 것을 계기로 처음 인연을 맺었으며, 같은 해 10월까지 10개월간 박근혜 대표 비서실장을 맡았다. 2007년에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캠프에서 활동하며 원조 친박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2011년부터 2012년 초까지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비대위원장과 여러 차례 의견 충돌을 겪으면서 차차 사이가 멀어졌고, 이때부터 소위 "탈박"이라는 비주류의 길을 걷게 된다. 저 당시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것 중 대표적인 예로, 박근혜가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변경하려고 하자 유승민이 "새누리당은 당명으로 쓰기엔 종교적인 색채가 너무 짙은 이름이다"라는 이유로 정면으로 반대했던 일이 있다. 그 뒤로는 소위 탈박 내지 비박계 인사로 분류되었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로도 박근혜정부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청와대와 여러 차례 충돌을 벌이다가, 2015년 7월 원내대표 당시 국회법 개정안을 두고 갈등의 정점을 찍었다. 특히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은 15년 4월에 있었던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로 대표되는 교섭단체 대표연설 이후였다. 그 연설 이후, 박근혜로부터 이른바 '찍박'으로 낙인찍혀 결국 원내대표직 사퇴까지 이르게 된다.

결국 이러한 갈등은 그때의 불씨가 화약고나 다름없던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공천 문제를 놓고 대폭발하여, 자신이 친박계와 비박계 간 대립의 정점에 올라서는 계기가 되었다.

무소속으로 20대 국회의원 당선 이후 새누리당에 복당하여 당내에서 꾸준히 당 개혁의 목소리를 내고 당의 진로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쓴소리를 하다가 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2017년초 탈당하고 나와 바른정당을 창당했다. 2017년 11월 전당대회에 출마하여 제3대 바른정당 대표가 되었다.

탈당 러쉬로 존립 자체가 위태로웠던 바른정당을 국민의당과의 통합을 통해 바른미래당으로 탈바꿈시키며 30석을 가진 원내교섭단체로 다시 올라섰다. 바른미래당 초대 공동대표로 선출되었다. 7대 지방선거 참패로 바른미래당 대표에서 사퇴했다.

바른정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경쟁자 남경필을 누르고 19대 대선 후보로 선출되어 출마하였다. 제19대 대통령선거 결과는 문재인 41.08%, 홍준표 17.05%, 안철수 21.41%, 유승민 6.76%, 심상정 6.17%..으로 문재인 후보가 당선 되었다.

유승민
1958년 1월 7일,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
173cm, A형
불교
바른미래당

학력
삼덕초등학교
대륜중학교
경북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위스콘신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경력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원
위스콘신 대학교 경제학과 조교
한국개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공정거래위원장 자문관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
대한민국 국회의원
한나라당 대구광역시당 위원장
한나라당 최고위원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
새누리당 원내대표
국회운영위원회 위원장
바른정당 대표
바른미래당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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